1920 *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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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명 : 뉴요커는 왜 그에게 찬사를 보냈는가
  • 작가명 : 김광우
 
예술비평: 백남준 예술의 미학성에 관하여

 

백남준은 청소년 때 하모니를 무시한 음악을 작곡해 현대음악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한 위대한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동경대학 졸업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를 썼다. 관념적인 예술에 반항하며 전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통해서였으며 이런 기질이 폭발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음악 교육을 받고 그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실천하던 존 케이지(1912~92)를 알고부터였다. 20살 연상의 케이지를 만난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1938년 순수 음악에 전자 음악을 결합시킨 ‘피아노를 위한 곡’을 작곡해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두를 달린 케이지는 1952년에 최초의 해프닝으로 알려진 ‘4분 33초’를 발표했는데,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아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었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행위 했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이 1959년 11월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발표한 피아노를 파괴한 퍼포먼스는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표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백남준에게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백남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1961년 플럭서스 창립 멤버가 되어 그룹으로 활동했는데 멤버들 대부분은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플럭서스는 다다의 정신을 되살리면서 예술적 전통과 예술에 있어서 전문적인 경향을 띠는 모든 것과 격렬히 대립했다. 이들의 활동은 독일에서 흔히 ‘악티온스’라고 불리는 해프닝, 거리 미술 등과 연결되어 있었고 플럭서스와 연관된 가장 유명한 예술가는 요제프 보이스다.

 


백남준은 1964년 뉴욕으로 갔는데 케이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보여준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과격했지만 한국인으로서 용맹한 모습을 보여준 것을 예외로 하면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경향이었다. 그리고 백남준이 아니더라도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장르로 출범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백남준과 동갑내기 볼프 포스텔이 1959년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백남준의 민첩한 뉴욕행이 비디오아트 레이스에서 포스텔을 능가하고 선두를 달리게 했고 그를 비디오아트의 황제로 추켜세운 사람들은 뉴요커다.


뉴요커는 왜 백남준의 예술에 찬사를 보냈을까. 자신의 예술적 뿌리가 없는 백남준이 모든 작업을 미국식으로 혹은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맞춤형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미국식 혹은 미국인의 입맛에 맛이란 복합매체의 공연, 팝아트, 아상블라주를 말한다. 대중영화와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의 대중미술은 1960년대에 이런 세 가지 경향으로 두드러졌다. 이런 경향을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에 접목시켰기 때문에 뉴요커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상블라주는 장 뒤비페(1901~85)가 1953년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자신의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이었지만 1960년대에 표현적인 목적을 위해 비미술적인 재료를 삼차원의 조각적인 구성물 안에 모으거나 결합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상블라주를 제작하는 많은 조각가들은 팝아트 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팝아트 전통에 속한 아상블라주는 버려진 물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대부분 아상블라주다. 뉴욕에서 성공하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런 기류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식의 팝아트 정신에 입각한 현란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들의 합성이다. 따라서 문명을 비판하거나 찬양한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전혀 사변적이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퍼포먼스에서 발견되는 나르시시즘이 비디오아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TV부처 ©
백남준의 작품은 수십 개 혹은 그 이상의 모니터가 등장해 다양한 영상들이 복잡해보이지만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리듬으로 간주하고 음악적으로 분석하면 소나타, 론도 등의 단조로운 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백 개의 모니터를 사용해 제작한 작품은 워홀의 백 개의 코카콜라병을 상기시킨다. 백남준의 작품은 조형적이어서 세련되어 보이고 시각적으로 어필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 이상을 발견하긴 어렵다.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로 전시적이며 유희적이고 유쾌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기계문명을 찬양했으며 예술을 흥을 돋우는 것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어록이나 언론과의 인터뷰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소위 대가들의 철학을 그에게서 발견하긴 어렵다. 예술철학의 빈곤은 매우 아쉬운 점이며 과연 그에게 주관적인 예술철학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예술을 흥을 돋우는 것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팝아트의 경향이 현재에도 만연한데 이런 경향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질을 떨어뜨린다. 역설적으로 백남준도 이에 앞장선 예술가였다.

 


1984년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귀국한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로 유명해졌다. 그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관념적으로 규정하려드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예술이 흡사 사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대중에게 예술은 재밌고 유익하다”라는 말로 변명했지만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골동품에 모니터를 부착한 작품들은 값비싼 소비상품에 불과하므로 예술을 사기라고 한 말이 이해된다. 그는 과연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며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려고만 한 듯하다.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재미있고 유익하며 매우 세련된 조형적 모습이지만 개성적이며 지성적인 사고의 결여로 성형미인처럼 보인다.


빌 비올라(1951~)에 의해 비디오아트는 현학적이며 진지해졌다. 비올라에게 예술은 사기가 아니다. 백남준과 달리 회화나 조각의 기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비올라의 작품을 비난하는 소수의 평론가들도 있지만 비디오를 순수하게 시각적 매체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디오가 단지 대중의 눈을 현혹시키는 도구로 전락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차세대 예술가 비올라에 의해서 비디오아트는 소비위주의 대중매체 이미지들과 격을 달리하게 됐으며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브제가 예술적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내적 사고와 충동이 권한으로 행사될 때이며 이런 기원은 고대로 올라간다. 백남준의 작품에 내적 사고와 충동은 나타나지 않고 애매한 주관만이 발견되는 것은 유감스럽다.   


비디오아트는 시각적 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1970년대에 확장되기 시작해 현재에는 미술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디오아트가 아니더라도 모니터를 부착하는 조각 작품이 많아졌고 설치에도 널리 사용되는데 여전히 비디오의 응용이 전시적이거나 장식적이어서 아쉽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필자는 197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종교철학을 공부했고, 이후 한국에서 미술관련 저술작업과 평론활동을 해왔다. ‘폴록과 친구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