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 * 160

제품 상세보기

문화본부입니다.
상세설명
  • 전시명 : 특집_서세옥의 그림세계
  • 작가명 : 김광우
‘사람’ 강렬한 의지 돋보여…빈틈없는 짜임새 ‘교과서적’

▲얼굴, 한지에 수묵, 73.8*74.8cm, 1979. ©
서세옥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십수 년 전 뉴욕 소호SoHo의 한 화랑에서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한국작가 4인의 그룹전이 열렸다. 그때 서세옥의 작품을 보고 앵포르멜 양식의 패턴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불과 몇점만 전시했으므로 그것들로만 작가를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다 며칠 전 덕수궁미술관에서 1950년대 말부터 근래까지 제작한 일련의 작품을 본 후 그때의 느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세옥에 관한 책과 글을 읽다가 몇몇 평론가들의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하나를 예로 들어 평론가의 글이 관람자에게 잘못된 인식을 주는 과오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정병관이 1989년 서세옥에 관해 쓴 글을 보자.


“가장 간결한 형태를 빈틈없는 구도 속에 배치한 묵적들은 ‘기’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힘’이라는 말에 신비 또는 숭고와 같은 말들을 더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산정의 최근작 문기에서 나온 추상’ 中에서)


이 글을 간결하게 하면 “가장 간결한 형태를 조형적으로 배치한 묵적에서 느껴지는 기 혹은 힘은 신비 또는 숭고로 이해된다”가 될 것이다. 이는 “나는 서세옥의 작품에서 신비감 또는 숭고함을 느낀다”라는 뜻이다. 어떤 회화적인 요소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줬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정병관은 이어서 적었다.


“현대 회화가 재즈음악의 리듬감 같은 것에 은연중에 침투되어진 것과 비교하면 산정(서세옥)의 그림은 고전적인 인간의 작품이며, 칸딘스키가 생각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에 속한다.”(동일한 글 中에서)


다양하고 난해한 현대회화를 “재즈음악의 리듬감 같은 것에 은연중에 침투되어진 것”으로 규정하는 건 현대회화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런 가정을 전제로 사용하게 되면 오류가 생긴다. 그리고 산정의 그림이 고전적이라는 것인지 산정이 고전적이라는 것인지 불분명한데, 어느 것이든 ‘고전적’이란 말은 문맥상 시사하는 바가 없고 다만 ‘고전은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독자를 오도할 소지가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칸딘스키의 예술 이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칸딘스키가 생각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라는 말을 삽입해 서세옥의 작품을 그런 부류에 포함시키는 건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혼돈을 유발시킨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정신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했지만 형이상학적 회화에 관해 논한 적이 없으며, 그의 작품은 형이상학적 회화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山丁 徐世鈺(1929~ )은 20세에 국전에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해 화단에 등단했으며, 1955년 불과 26세의 나이에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고, 32세에 국전 심사위원이 됐으며, 수십년간 서울대 강당을 지키면서 한국 화단에서 높은 명성과 권위를 누려왔다. 1960년대 墨林會로 대표되듯,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을 이끌었던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인간 시리즈 작업을 통해 이름을 남겼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화단에 강력한 파장과 폭넓은 진폭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은혜 기자
 


서세옥의 작품이 앵포르멜 양식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앵포르멜(Informel)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앵포르멜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무정형 혹은 비기하적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가 창안해낸 명칭으로 1945년 경부터 10여년 동안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상응해 유럽에서 전개된 회화운동을 말한다.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엄격한 추상과 몬드리안을 비롯한 조형주의자들의 기하적 추상에 대한 반발로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하는 ‘서정적 추상’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됐다. 이성으로 감지되지 않는 대상을 추상화해 불완전한 서술, 또는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앵포르멜과 동의어로 타시즘이 있다. ‘얼룩’이란 뜻의 프랑스어 Tache에서 파생된 영어로 1954년 프랑스 평론가 샤를 에티엔이 전후 유럽의 서정적 표현적 추상을 기하적 추상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타시즘과 앵포르멜은 정확히 구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는데, 타시즘이 예술가의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와 ‘제스처’로서의 얼룩과 색면들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 데 비해, 앵포르멜은 무의식적인 서예 형태로서의 추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앵포르멜과 타시즘을 염두에 두고 서세옥의 작품을 바라보면 이해가 쉽다. 서예형태와 비기하적 형태가 바로 그것이며 묵적의 얼룩이 그것이다. 잠재의식의 환상을 직접 표현하는 이런 형태들은 불완전한 서술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 문제는 추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이다. 인간을 기호화함에 있어 서세옥은 단순한 방법으로 상형문자화 했는데, 기발한 착상처럼 생각되지만 인간을 너무 안일하고 쉬운 방법으로 기호화 한 듯하다. 추상은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취약점 때문에 과정이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서세옥의 인간기호를 보면 사람 인자를 변형시켜 패턴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의 인간 기호에는 인본주의에 대한 사고가 별로 묻어나지 않는다.




▲사람들, 닥지에 수묵, 84.1*98.3, 1981. ©
‘사람들’(1981, 위 그림)을 보자. 동일한 인간 기호가 반복되는데 형상을 약간 달리해 각 인간의 개별성이 존중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인간성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앵포르멜 화가들이 대체로 중시한 ‘서정성’의 결여이기도 한데, 추상이 서정적인 요소를 결여하고 도식적으로 사용될 때 디자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갈겨쓴 듯한 서예적 추상의 ‘춤추는사람들’(1981, 아래 그림)은 어떤가. ‘춤추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주제로 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그려왔다. 일반적으로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한다든가 화합과 평화를 기원한다든가하는 인본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다. 서세옥의 ‘춤추는 사람들’은 갈겨쓴 글 그 이상의 무엇을 전달해주지 않아 휴머니즘을 엿보기 힘들다. 많은 작품에 ‘사람들’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인간기호의 상하좌우 연결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특기할 점은 이런 구성이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배치된 것이며 먹의 농도를 조절해 매체가 지닌 속성을 시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한 것이다. 조형의 측면에서 보면 그에겐 기민함이 있으며 매우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다.


▲춤추는 사람들, 닥지에 수묵, 98.4*121.6cm, 1981. ©
1996년작 ‘사람’(아래 그림)은 예외적으로 훌륭하다. 양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위로 뻗은 사람의 모습으로 머리를 한 점의 얼룩으로 처리하는 노련한 솜씨를 보인다. 여기에는 인간의 강렬한 힘과 의지가 나타나 있으며 몸체 가운데에 구멍을 남겨놓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공간을 통한 입체를 성취했다. 훌륭한 회화는 관람자를 설레게 만든 후 안정시킨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어느 정도 성취된 작품이다.



▲사람, 닥지에 수묵, 92.7*116.5cm, 1996. ©
완전추상만을 제작하는 작가는 자칫 내면세계를 반복해서 유사한 형상으로 양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자연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는 화가는 절경을 찾아다닐 곳이 많기 때문에 주제에 고갈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면세계의 풍경 혹은 환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추상 화가는 오랫동안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주제에 고갈을 느끼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추상화가들이 경험하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서세옥은 반추상 혹은 반재현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작품들도 전시됐는데, 대부분 소품들이라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구성에 관해 특기할 점은 화면의 처리이다. 빈틈없는 짜임새는 미대 교수로 오래 재직한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으로 이는 종종 아카데미즘이라 불린다. 비대칭적이지만 기하에 기반을 두는 면 나누기, 힘의 조절, 잡아당기고 미는 형상들 사이의 대립 등이 교과서적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작가개성의 결여로 보일 수 있다. 서세옥의 ‘구름이 흩어지는 공간’(1977, 아래 그림)과 ‘행인’(1978)이 그런 예다.


▲구름이흩어지는 공간, 한지에 수묵, 100.7*128cm, 1977. ©
점으로 처리한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화면 중앙에 커다란 공간을 나타낸 ‘구름이 흩어지는 공간’은 커다란 여백이 관람자에게 주는 공허의 느낌이 어느 정도 성취됐지만 구름의 먹점을 화면 가장자리에 골고루 그리고 짜임새 있게 배치함으로 인위적인 구성이 자연스러움을 반감시킨다. 이런 식의 구성은 ‘행인’(아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행인, 한지에 수묵, 74.8*81.4cm, 1978. ©
화면 네 모퉁이의 ㄱ자와 ㄴ자는 건물 혹은 우리가 약도를 그릴 때 흔히 사용하는 상징적 길모퉁이를 의미한다. 행인 한 사람이 교차로 중앙에서 왼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여기에서도 지나친 짜임새의 기하적 구성으로 인해 중앙의 텅 빈 공간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혁명적 구성이 아카데미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는 미대 교수들이 교과서적인 혹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체의 속성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매체의 속성상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 장점이 있고 캔버스에 유채나 아크릴로 그리는 장점이 있다. 화가의 적절한 매체선택은 칭찬할 일지만 매체의 속성과 작가의 정신을 과도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유채와 아크릴을 사용할 때도 붓에 힘을 주어 강약을 조절하고 색채의 톤을 조절한다. 이런 화가의 의도는 존중돼야 하지만 한지에 먹을 사용할 때 절로 생기는 농담이나 먹을 진하게 또는 엷게 사용하는 기교에 의한 시각적 민감함을 매체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지 않고 화가의 심오한 철학이 베어 나오는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마지막으로 미술에 대한 작가의 博識과 작품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작가가 평소에 노자를 말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 반드시 무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스스로 말한다. 따라서 평론가는 작품이 전하는 말만 전달해야지 그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자신도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억지논리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 © 이선종 필자는 197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종교철학을 공부했고, 이후 한국에서 미술관련 저술작업과 평론활동을 해왔다. ‘폴록과 친구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등의 저서가 있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