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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명 : 미술비평_오수환 변화展(가나아트센터,2004.9.3~9.30)
  • 작가명 : 김광우

 

自然이 보이는가...무절제한 실험의 느낌
8월 25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은 오수환의 작품전을 다뤘다. 큰 지면을 할애했기에 회화적 사건이라도 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기자는 “예술가의 길이 초월이나 절대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과 통한다면, 오수환은 이에 걸맞은 작가다”라 했는데, ‘초월’과 ‘절대’란 말이 거슬린다. 미술이론가가 아니더라도 예술가와 작품에 관해 글을 쓸 수 있지만, ‘초월’, ‘절대’, ‘구도자’란 말로 작가를 서술하는 건 자신도 모르게 함정을 파는 것이다. 오수환은 말한다. “나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하려 한다.” 이것을 기자가 “초월이나 절대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오수환의 말은 단지 ‘나는 추상을 그린다’는 뜻일 뿐이다.

오염된 비평언어들이 작품을 망친다

오수환에 적용된 또 다른 문장, “한 획을 긋는 것이 모든 형사의 출발점인 동시에 기운의 척도가 된다”라는 말은 중국 화론의 서술이지만, “이미지는 선을 긋는 것으로 시작되며 선에서 기품을 느낄 수 있다”라는 의미다. 이는 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어려운 용어의 사용이 오히려 이해를 방해한다. 한 소설가는 그의 전시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에게는 서양의 현대라는 것 그 가운데서도 포스트모던에 대한 치열한 의문과 옹호가 녹아 있고, 불교의 ‘불성은 일체 중생’이라는 사상이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과 선을 종합하는 미가 여백과 곡선의 우아한 세계현실에의 정신적 조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술을 업으로 삼는 내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포스트는 ‘이후’란 뜻인데, “서양의 현대(모던)라는 것 그 가운데서도 포스트모던(모던 이후)”이란 의미를 알지 못하며, “포스트모던에 대한 치열한 의문과 옹호가 녹아 있고”란 의미를 알지 못하고, 나머지의 말의 의미도 오수환의 작품과 관련해서 알 수 없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오수환의 어떤 의문과 옹호가 녹아 있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과장된 의미와 비논리가 만연하는 한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교량이 놓아지지 않는다. 예술가도 작품도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비평과 설명엔 좀 더 쉬운 말을 구사해야 한다. 난해한 말들은 진실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수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글이 난해해진 데는 작가의 책임도 있다. 그가 자신의 화론 혹은 예술론을 난해하게 설명하면서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 ‘변화’에 관해 그는 말한다. “자연의 색, 자연의 형태를 선택하지 않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할까. 자연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건 ‘변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변화’도 바로 자연이라는 테마다(…) 어떤 제한이나 규정으로부터 그것들을 다 풀어버리는, 다 놔버리는 쪽으로, 그렇게 가 볼까 한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사물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자연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 ‘변화’다. 나는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스럽게 그리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형상화

그의 말대로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자연에 대한 그의 개인적 추상표현이다. 화가들마다 추상하는 방법이 다른데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선, 얼룩, 큰 반점들로 자연을 다양하게 상징했다. 특히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간 속에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며 사물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선을 해방시켜놓자. 선의 구조적인 힘을 소생시키자. 선은 더 이상 가시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선은 불균형이고 과정이다. 공허, 구성적 공허이다. 가식적이게 해주는 것, 나 자신을 하나의 선으로 만들어, 선이 되게 하는 방식.” 이 말 역시 의미가 명확치 않다. 그가 색의 대비에서 자연의 동력을 봤다면 당연한 느낌으로 선과 색은 회화의 본질이다. 화가에 따라 색을 강조하거나 선을 강조한다. 색을 회화의 본질로 보는 사람은 색과 색이 만나는 곳에 선이 절로 생긴다고 보지만, 선을 회화의 본질로 보는 사람은 형상이 우선이고 색은 선을 사용한 다음에 칠해지는 것으로 본다. 오수환은 선을 불균형, 과정, 공허, 구성적 공허이면서도 가식적이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선이 현상이나 상태를 드러내더라도 그 자체는 과정이며 공허한 것이라고 한다. 선이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므로 당연한 사고다. 그래서 그는 선을 사물의 형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사용해 추상이미지를 그리지만, 이런 식의 작업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성과를 거두었고 그가 이런 작업을 한다고 해서 새삼스러운 회화적 사건은 아니다.

추상기호로 사상의 전달은 불가능해

일찍이 동양의 서예는 유럽과 미국 화가들에 의해 회화에서의 새로운 추상표현으로 실험됐으며, 마크 토비의 ‘글쓰기 회화’는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에서도 입지를 마련했다. 토비는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가르친 바하이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자신의 회화와 관련지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그런 점을 발견하긴 어렵다. 화가가 노자?장자를 말할 수 있고, 우주생성에 관한 자기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불성은 일체 중생’이라는 사상”을 추상이미지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순 있지만, 그런 점을 관람자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한 폭의 그림에 너무 많은 사고를 담아 전달하려 하지만 개인적 추상기호나 추상도상들로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작가가 그렇다고 주장하니까 그런 시각을 갖고 바라보게 되지만 내가 그의 작품들을 보았을 땐 그런 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느낀 점은 소심한 행위의 반복, 전통조형에 대한 집착, 실험, 무절제이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 툼블리의 무위적 요소는 찾을 수 없었다. 오수환은 무위에 관해 강조했고 평론가와 소설가도 그 점을 높이 샀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회화에서 말하는 무위는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은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은 선과 색이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느끼게 해주는 회화적 요소로 한때 유럽의 화가들이 추구했다. 오수환의 작품에는 오래 연마한 세련된 선과 얼룩이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추상 이미지 회화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변화’는 자연에 대한 다양한 상징 이미지들이며 퍽 개인적인 이미지들이다.

김광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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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